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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순이관찰일지

유기자아

by Dabong 2022. 5. 13.

 거실에서 스트레칭을 하다가 무심코 책장에 꽃혀진 책들을 보게됐다. 중학교때 한창 모으던 일러스트책과 잡지, 그림책, 실기책 등등 10년도 훨씬 더 된 옛날 책들이었다. 신기하게도 책들 하나하나 언제, 어디서 왜 샀는지 또 그 책들로 뭘 했는지가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스트레칭을 멈추고 홀린듯 꺼내 봤는데 보면 볼수록 기분이 묘했다. 훨씬 더 많은 책들과 자료가 있었지만 이사하면서 추리고 추려서 애정하는 것들만 남겨놨는데 정리하면서 버린 책들까지 다 기억이 났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다양한 이미지들을 접할수 있지만 어렸을때는 무조건 서점에서 종이책을 사모으던 소소한 추억이 있었더랬다... 내가 소장하는 일러스트들의 8할은 일본책인데 생각해보면 수입책이라 비쌌음에도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면 군말없이 턱턱 사주신게 새삼스레 감사하게 느껴졌다. 화방에서도 사고싶은 재료들을 담아서 살때면 힉~ 무슨 물감이 이렇게 비싸?? 하면서도 어휴 엄마 시간없다 빨리 계산하게 담으라며 대수롭지 않아했던걸로 기억한다. 그래... 우리 김여사가 지어미?의 정서적 교류는 없었어도 물직적 교류는 굉장히 충실하게 해주셨지. 문득 그때처럼 관심과 대가없는 투자가 너무나 받고 싶으다. 지금 그렇게 해준다면 졸라게 잘 활용하여 투자대비 고수익을 안겨드릴 자신이가 있는뎁☆
 
 그렇게 한참을 이책 저책 뽑아보다가 대학생되서 내돈내산 잡지책 하나를 발견했다. 월간 일러스트책이었고 이 또한 내가 언제 어디서 왜 샀는지가 뇌리를 스치면서 갑자기 서글퍼졌다. 일러스트 유학특집편이 수록되있었는데 마치 욕조의 수도꼭지를 뽑으면 빨려들어가는 소용돌이처럼 그때로 순식간에 돌아가버렸다. 학교 졸업을 앞두고 돈을 모아 그림 그리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지금은 돈만 모으는 삶을 살게 되었다. 웃긴건 이 때까지 모은 돈도 없는데 말이다. 돈돈거리면서 살지만 돈은 없다. 이럴줄 알았으면 돈 모아 그림 그리는게 아니라 그림 그려서 돈을 모을 걸 그랬다. 물론 그때는 힘들었고 괴로웠고 어쩔수 없었다. 근데 왜 그렇게까지 외면했을까 생각해보면 여기서 더 가난해지면서까지 해낼 자신이 없었던거 같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1원 한푼도 벌지 못하면서 좋아하니까 재밌으니까 따위로 자위하며 사는 대책없는 멍청이가 될까봐 겁이 났던거 같다. 그림같은 건 돈 많은 한량들이나 그리는 거고 돈 버는 그림은 나는 그릴 수 없을거라고.. 내가 나여도 내 그림에 돈을 낼 수 없을 거라고... 나는 나에게 그림을 못 그리게 하려고 셀프 가스라이팅을 해왔다. 이제까지 불쑥불쑥 찾아왔던 욕구를 다 부질없고 미련한 짓이라며 어떻게든 묵살해버리고 하찮게 여겼다. 자존감과 자존심, 자신감까지 사실은 내가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거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세월이 그림을 그린 시간을 추월하며 '0' 의 상태로 리셋되자 비로소 알게됐다. 그 동안의 온갖 감정의 불순물들이 가라앉고 나자 구석에서 잔뜩 겁에 질려 벽을 보고 머리를 박은채 눈치만 보고있는 작고 초라한 유기견이 생각났다. 그게 나라고. 내 유기자아라고. 내가 나한테 이렇게 모질고 잔인할 수가 있을까? 마치 유기견에게 너가 말도 안 듣고, 잘하는 것도 없고, 쓸모도 없으니까 버리는 거야. 다른 개들처럼 예쁘지도 않고, 돈만 축내고, 멍청한 짓만 골라하고, 도움되는게 1도 없어. 존재자체가 골칫덩어리야. 아예 처음부터 너 같은거 키우는게 아니었는데 뭐가 좋다고 시작했을까. 당장 내 눈에서 사라져 쳐다보지 말고 꺼지라고 하는 꼴이었다. 내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나는 이 유기자아에게 무슨말을 해줘야 될까? 무엇을 해줘야 할까? 나를 잘 키워야지. 나에게 많은 기회를 줘야지. 잘 할때의 나만 좋아하는게 아니라 나의 전부를 사랑해야지.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손을 내밀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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