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가 없어 인간에게 흥미가 없지만 멋있고 잘생기고 예쁘고 아름다운 인간은 너무나 고자극이다. 평소에 인물에 관심이 없다가 멸종위기 생명체 미남들을 몇명 알게되고 나선 저 아름다운 피사체들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왜 그리고 싶은걸까? 그리고 싶으면서도 그리고 싶지 않다.
손 놓은지 너무 오래되서 저 갓벽한 생명체를 허접한 그림실력으로 망쳐버리면 어쩌나 싶어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젠 뭐 어디가서 전공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손놓은 세월이 그림 그렸던 세월을 추월해버렸으니 다시 선긋는 기초부터 배워야 될판이다. 정말이지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리는 행위에 꽂혀 생각이 많아진다. 몇 시간째 미술학원만 검색중인데 원데이 클래스같은 아마추어, 일회성 수업은 시시하고,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화실같은 곳에서 내 능력밖의 일은 도움받고 싶지만 나이많은 고인물 화실은 거부감이 들고 가기싫다. 찾고 찾다가 괜찮은 곳을 하나 발견했는데 커리큘럼을 보니 왠지 이런거라면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시작을 못하겠으니까 돈 내고 자극이라도 받아서 뭐라도 배우면 좋을것 같기도 하고... 오락가락한다. 자의식 과잉과 자의식 결핍이 충돌한달까?.
자의식 과잉은 ' 야 그래도 그린 세월이 몇년인데 이거 못하겠냐? 그리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난생 처음 그려보는것도 아니고, 하면 또 겁나 완벽주의에 빠져서 잘 해버릴것 같은데 안하니까 그렇지 하면 된다니까?? 이 돈내고 하기엔 좀 아깝지 않냐?? '
자의식 결핌은 ' 시작을 못 할정도면 그 만큼 두렵고 어려운건데 손 푼다는 생각으로 가서 좋은 영향을 받을수도 있잖아? 그렇게 잘 그리고 싶고 못 그릴까봐 겁나는 건 자본주의로 치료받는거지. 뭘 망설여? 실력이 뽀록날까봐 안 해버리려는거 아님? 이게 자의식 과잉이라는거지. 그린 세월이 몇년이면 뭐하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지금 바로 종이에다 생각나는 걸 그릴수 있는지. '
마음이 복잡하다. 갑자기 입시 트라우마가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서 상담받을 시뮬레이션을 돌리니 눈물이 찔끔나고 속이 매스껍다. 분명 가면 그림 그린적 있으세요? 어떤 걸 그리고 싶으세요? 원하는 그림 스타일이 있으세요 등등 물어보고 기본기 테스트 같은걸 할텐데 생각만으로 쭈글쭈글 해진다. 하...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됐냐... 잘하고 싶고 남들이 봐도 잘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고 근데 그렇게 안 될것 같으니 내가 너무 초라해질까봐 회피하려는게 전형적인 찐찌의 모습이구나.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된다. 그래... 내가 즐기지 못해서 그만 뒀었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손 놓은지 몇년이 흘렀어도 나는 여전하구나.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라는 걸 잊고 있었다. 언제쯤 나는 즐길수 있을까...
앤서니 웰링턴의 배움(의식)의 4단계에서 나는 2~3단계 어딘가에 정체되어 있는것 같다. 배움에 있어 행복한 단계는 1단계와 4단계에서 뿐인데 분명한건 나는 1단계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즐기려면 무조건 4단계로 가야하는 방법 뿐인 걸 알고 있다. 무의식적 지식의 단계로 가기위해 다들 고군분투하고 있고 4단계로 가지 못해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오래동안 확실히 그만두지도 못 한채 찌질하게 있는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애매한 재능과 얄팍한 지식은 아는것도 아니고 모르는것도 아닌, 할 줄 아는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니라서 어디가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처음이니까 당연히 모르죠! 라고 당당할 수 없기에 숨어버리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하고 싶은 욕구와 잘 하고 싶은 욕망은 어찌보면 즐기고 싶은 갈망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건 찌질한 나를 마주볼 비위와 숨지 않고 부딪힐 정신력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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