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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순이관찰일지

포맷이 안되면 롤백

by Dabong 2022. 4. 5.


인류애가 없어 인간에게 흥미가 없지만 멋있고 잘생기고 예쁘고 아름다운 인간은 너무나 고자극이다. 평소에 인물에 관심이 없다가 멸종위기 생명체 미남들을 몇명 알게되고 나선 저 아름다운 피사체들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왜 그리고 싶은걸까? 그리고 싶으면서도 그리고 싶지 않다.

손 놓은지 너무 오래되서 저 갓벽한 생명체를 허접한 그림실력으로 망쳐버리면 어쩌나 싶어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젠 뭐 어디가서 전공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손놓은 세월이 그림 그렸던 세월을 추월해버렸으니 다시 선긋는 기초부터 배워야 될판이다. 정말이지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리는 행위에 꽂혀 생각이 많아진다. 몇 시간째 미술학원만 검색중인데 원데이 클래스같은 아마추어, 일회성 수업은 시시하고,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화실같은 곳에서 내 능력밖의 일은 도움받고 싶지만 나이많은 고인물 화실은 거부감이 들고 가기싫다. 찾고 찾다가 괜찮은 곳을 하나 발견했는데 커리큘럼을 보니 왠지 이런거라면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시작을 못하겠으니까 돈 내고 자극이라도 받아서 뭐라도 배우면 좋을것 같기도 하고... 오락가락한다. 자의식 과잉과 자의식 결핍이 충돌한달까?.

자의식 과잉은 ' 야 그래도 그린 세월이 몇년인데 이거 못하겠냐? 그리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난생 처음 그려보는것도 아니고, 하면 또 겁나 완벽주의에 빠져서 잘 해버릴것 같은데 안하니까 그렇지 하면 된다니까?? 이 돈내고 하기엔 좀 아깝지 않냐?? '
자의식 결핌은 ' 시작을 못 할정도면 그 만큼 두렵고 어려운건데 손 푼다는 생각으로 가서 좋은 영향을 받을수도 있잖아? 그렇게 잘 그리고 싶고 못 그릴까봐 겁나는 건 자본주의로 치료받는거지. 뭘 망설여? 실력이 뽀록날까봐 안 해버리려는거 아님? 이게 자의식 과잉이라는거지. 그린 세월이 몇년이면 뭐하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지금 바로 종이에다 생각나는 걸 그릴수 있는지. '

마음이 복잡하다. 갑자기 입시 트라우마가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서 상담받을 시뮬레이션을 돌리니 눈물이 찔끔나고 속이 매스껍다. 분명 가면 그림 그린적 있으세요? 어떤 걸 그리고 싶으세요? 원하는 그림 스타일이 있으세요 등등 물어보고 기본기 테스트 같은걸 할텐데 생각만으로 쭈글쭈글 해진다. 하...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됐냐... 잘하고 싶고 남들이 봐도 잘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고 근데 그렇게 안 될것 같으니 내가 너무 초라해질까봐 회피하려는게 전형적인 찐찌의 모습이구나.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된다. 그래... 내가 즐기지 못해서 그만 뒀었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손 놓은지 몇년이 흘렀어도 나는 여전하구나.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라는 걸 잊고 있었다. 언제쯤 나는 즐길수 있을까...

앤서니 웰링턴의 배움(의식)의 4단계에서 나는 2~3단계 어딘가에 정체되어 있는것 같다. 배움에 있어 행복한 단계는 1단계와 4단계에서 뿐인데 분명한건 나는 1단계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즐기려면 무조건 4단계로 가야하는 방법 뿐인 걸 알고 있다. 무의식적 지식의 단계로 가기위해 다들 고군분투하고 있고 4단계로 가지 못해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오래동안 확실히 그만두지도 못 한채 찌질하게 있는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애매한 재능과 얄팍한 지식은 아는것도 아니고 모르는것도 아닌, 할 줄 아는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니라서 어디가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처음이니까 당연히 모르죠! 라고 당당할 수 없기에 숨어버리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하고 싶은 욕구와 잘 하고 싶은 욕망은 어찌보면 즐기고 싶은 갈망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건 찌질한 나를 마주볼 비위와 숨지 않고 부딪힐 정신력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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